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소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지은이:이동우     /종이책 구매.
진솔은 아그네사가 좋았다. 저 맑은 음색. 사랑이 끝나면 노래도 끝인 여자.
지나간 사랑은, 돌이켜봐도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정말 사랑이었나? 아니었나?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진솔이 이쪽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건은 창턱에 걸터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빌딩 앞 행인들 가운데서 그녀의 모습을 단번에 알아보았지만, 괜히 장난 한번 걸어본 것이다. 진솔이 손을 들고 반짝반짝 흔드는 모습에 그는 소리 없이 웃은 참이었다.
"뭐야, 왜 어설프게 탈출을 시도하고 그래요? 그냥 거기 계단 같은 데 편하게 앉아 있어요."
"... 아직도 보고 있어요?"
"그럼 나 혼자 뭐 해. 여기 앉아서 기다리는 거지 뭐."
손에 쥔 휴대폰이 빗소리에 섞여 다시 울리자 진솔은 확인도 않고 무뚝뚝하게 받아 들었다.

"됐어. 자꾸 전화한다고 네가 나한테 올 것도 아니면서 뭘."

잠깐의 침묵 뒤에 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갔으면 좋겠어요?"

진솔에게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그가 꼬마였을 무렵을 한번 상상해보았다. 괴상한 물건들을 쥐고 다니며 해적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 소년을. 건의 짓궂은 웃음이 진솔은 좋았다. 때로는 심술부리듯, 때로는 부드럽고 따스하게 말하는 그가, 무심한 척 잘난 척도 하지만 선한 느낌을 주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불현듯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랑... 스러워?
여기 앉아서 당신하고 얘기하고 있으니까 좋네. 잠깐 말이나 하고 싶어 억지로 데려온 거예요. 알죠?
"저런... 두 시간 반을 기다린 사람한테 이렇게 무정할 수가 있나, 상처받았소."
"나올 거예요, 바람맞힐 거예요? 확실하게 말해요."
말도 안 돼. 그녀에게 문득 쓴웃음이 스쳐 갔다. 그 남자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 남자가 언제 입맞춤을 했고... 언제 내가 기대하도록 했는데? 그는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그런데... 왜 마치 잠든 사이 몰래 찾아와 입 맞추고 가기라도 한 것처럼, 내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 진솔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습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우울한 오후 한때였다.
"그게 더 나빠. 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어요? 분명히 나한테 화났으면서 이유조차 말해주지 않고, 왜 덮어두려고만 해요?"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당신 성격상 화가 났다는 건 내가 분명 무슨 중요한 잘못을 했다는 뜻이라고. 그런데 아무리 되돌려봐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모르는 사이에 실수를 한 건지. 하지만 당신은 나한테 그걸 알려줄 마음이 없어.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겠지만, 당신은 그만 날 용서해야 해. 그러지 못하겠다면 난 이유를 물어야 돼요."
"나와줘서 고마워요. 피곤했을 텐데."
"아뇨, 나도 재미있었는데요 뭐."
"그냥 재미만?"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기다릴게요. 당신 감정 알게 될 때까지. 길게는 아니고 짧으면 몇 달, 길어도 많이 길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나, 정리할 수 있어요. 오래는 안 걸려요."
"당신이 힘들잖아, 그런 건."
"내 몫이니까 괜찮아요. 내가 감당할 부분이니까."
우리는 안 될 것 같다
네 번은 하지 말자
    ㅡ 세 번 시작하고 세 번 끝난 날
"실은 나, 극장에서 뭐 먹으면서 보는 사람 싫어하는데."
"사실은 나도 싫어해요."
"그런데 왜 샀어요, 이거?"
"당신이 좋아하는 줄 알았지."
"본인이 심심할 땐 꼭 그렇게 누구를 불러내거나 데려가야 하나요? 나쁜 습관이에요."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내 전부는 아니에요. 그래서도 안 되고. 감정을 서둘러서 결론 내릴 필요 없다는 거 알았고 늘 눈앞에 두고 봐야 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뭐.
솔직하게 말할게요. 사람이 사람을 아무리 사랑해도, 때로는 그 사랑을 위해 죽을 수는 있어도 그래도 어느 순간은 내리는 눈이나 바람이나 담 밑에 피는 꽃이나 그런 게 더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거. 그게 사랑보다 더 천국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거. 나, 그거 느끼거든요?

당신하고 설령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많이 슬프고 쓸쓸하겠지만 또 남아 있는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사랑은 지나가는 봄볕인 거고. 세상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힘든 고통이니까 난 사절하고 싶거든요. 근데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가면서도 당신 만나면 금세 흔들리고, 잘 안 되고 말아요.

   그래서 불안해요? 그렇게 흔드는 내 곁에 있는 게?

내가 나 혼자서 굳게 서 있지 못할까 봐, 좀 걱정되는 거. 스스로 초라한 거 같잖아.

'독서 추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0) 2020.03.23
언어의 온도  (0) 2020.03.20
구의 증명  (0) 2020.03.20
혼자가 좋은데 혼자라서 싫다  (0) 2020.03.20
404 이름을 찾을 수 없습니다.  (0) 2020.03.20

+ Recent posts